인도적 지원의 미래, 조기 회복에서 시작된다 [기고문]
[※ 편집자 주 = 오는 19일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 인도주의의 날'입니다. 쇼코 노다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차장보 겸 위기대응본부장은 세계 인도주의의 날을 맞아, 위기 상황에서 긴급구호를 넘어 삶의 터전과 미래를 되찾아주는 '조기 회복'의 중요성과 한국의 기여를 강조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연합뉴스에 보내왔습니다.]
마리아 알리(Maria Ali)가 수년간의 시리아 분쟁 끝에 고향인 홈스(Homs)로 돌아왔을 때, 집으로 향하던 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잔해가 길을 가로막아 주택과 상점으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고, 지역주민들이 일상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소득이 필요했다. 동시에 한 번도 고향이라 부르기를 멈춘 적 없는 이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도 마리아는 힘을 보태고 싶었다.
대한민국 외교부의 지원으로 추진되는 유엔개발계획(UNDP)의 REVIVE 프로그램을 통해, 마리아는 현재 피해지역의 잔해와 폐기물을 치우는 작업팀을 이끌고 있다. 잔해관리 작업을 통해 막혔던 도로가 다시 열리면서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상점들이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는 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자신의 삶을 다시 일구어 나가고 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2026년 5월 말 기준, 전 세계 2억5천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긴급한 인도적 지원과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여성과 여아들은 더욱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고 필수적인 지원과 서비스에 접근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위기 상황의 최초 대응자이자 지역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본래 유엔의 인도적 지원 체계는 긴급구호를 제공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갈수록 장기화하고 복잡해지는 인도적 위기는 그 이상의 대응을 요구한다. 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생계를 회복하고 필수서비스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무력 분쟁과 기후재난, 강제 이주 상황이 일시적인 위기에 그치지 않고 수년간 지속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거나 재난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미래를 계속 미뤄둘 수 없다. 위기 발생 초기부터 삶의 터전과 생계를 회복하고 필수서비스를 복구하며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갈 기회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과 개발협력을 구분해 온 기존의 접근방식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 회복은 긴급상황이 끝난 후에야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 위기가 끝난 '이후'라는 명확한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복은 위기의 첫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피해 주민들이 위기로 잃어버린 삶의 기반을 하루빨리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로가 다시 열리면 단절되었던 지역사회가 연결되고, 교량이 복구되면 농민들은 농지와 시장에 다시 접근할 수 있다. 보건시설이 정상화되면 생명을 살리는 의료서비스가 주민들의 일상 가까이 돌아온다. 임시 거처와 복구된 주택은 안전과 존엄을 되찾아준다. 긴급일자리는 당장의 소득을 제공하는 동시에 주민들이 스스로 지역사회를 다시 일으킬 기회를 만든다. 이러한 노력은 위기가 끝날 때까지 미룰 수 없으며, 인도적 지원의 필수적인 일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조기 회복(Early Recovery)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리더십은 스스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한국은 개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국제사회의 주요 공여국이자 개발협력 파트너로 성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회복에 대한 투자가 곧 사람과 제도, 그리고 지속 가능한 평화와 번영의 토대에 대한 투자임을 보여준다.
한국과 UNDP의 인도지원 플래그십 REVIVE 프로그램은 조기 회복 노력을 통해 긴급구호와 지속 가능한 회복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인도적 지원이 생명을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기의 가장 초기 단계부터 지역사회가 스스로 미래를 다시 일구어갈 수 있도록 지원할 때 더욱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한국과 UNDP의 공통된 믿음이 담겨 있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분쟁과 재난을 겪고 있는 여러 국가에서 지역사회가 핵심인프라와 필수서비스를 복구하고, 지역경제를 되살리며,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전 세계의 인도적 지원 수요가 날로 증가하는 반면 가용재원은 갈수록 압박받는 지금, 이러한 접근은 더욱 중요하다. 한정된 재원 하나하나가 더 큰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위기에서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미래의 위기를 견뎌낼 수 있도록 취약성을 줄이고 회복력을 키워야 한다.
매년 8월 19일은 세계 인도주의의 날(World Humanitarian Day)이다.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 유엔 사무소에 대한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은 22명의 유엔 동료를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날은 세계 곳곳 가장 어려운 위기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의 숭고한 용기를 되새기게 한다.
세계 인도주의의 날을 맞아 전 세계 인도주의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우리는 마리아 알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자기 삶과 지역사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마리아의 결연한 의지는 인도적 지원의 진정한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인도적 지원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의 미래를 다시 세웠는가로도 평가되어야 한다. 위기가 끝날 때까지 회복을 미뤄둘 수 없다. 회복은 위기의 첫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차장보 겸 위기대응본부장. UNDP 인도 국가사무소 상주대표, 몰디브 유엔상주조정관 겸 UNDP 상주대표, UNDP 네팔 국가사무소장, 몽골 UNDP 부대표, UNDP 뉴욕본부 총재실 프로그램 전문관 등 역임. 25년여 동안 콩고민주공화국·파키스탄 등에서 위기 대응 및 분쟁 후 분야 총괄.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08/18 09:55 송고 2026년08월18일 09시55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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