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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의 시대, 왜 다시 금속인가···88세 엄태정이 KAIST에서 던진 질문

Kyunghyang Shinmun ·
반도체의 시대, 왜 다시 금속인가···88세 엄태정이 KAIST에서 던진 질문

엄태정 작가가 지난 24일 대전 카이스트 미술관 앞 야외에 설치한 카이스트 개교 50주년 기념 조각 ‘낯선 자의 출현 I II III’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카이스트는 당초 개교 50주년인 2021년에 맞춰 기념 작품을 설치하려 했다. 하지만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하다 이번에 엄태정 작가의 조각을 설치하게 됐다. 배문규 기자

“쇠를 용접해 형태를 만들다 보면 그 일이 다시 제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고민과 상처, 아픔과 기쁨을 거친 조각은 결국 제 모습이 됩니다. 늘 작업하며 사유하는 것은 타자, 종교적으로는 신을 뜻하는 ‘낯선 자’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대전 카이스트(KAIST) 캠퍼스 미술관 앞에 세 개의 은빛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한국 추상조각 1세대를 대표하는 엄태정 작가(88)가 카이스트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세운 높이 350㎝의 금속 조각 ‘낯선 자의 출현 I II III’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쉼 없이 지나는 이 곳에 등장한 낯선 존재로부터 이공계 학생들이 창조적 사유를 이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KAIST 미술관은 오는 26일부터 엄태정 개인전 ‘탈(脫)창조의 세계로’를 연다. 지난 5월 미술관 정식 사용 승인을 받고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첫 전시다.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난 엄태정 작가는 첨단 과학의 상징인 카이스트에서 전시를 여는 데 대해 “과학은 이성적인 연구 과정을 거치고 예술은 창조의 과정을 거치지만, 과학과 예술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이라고 말했다.

엄태정은 서울대 조소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대표적인 공공조각으로는 1995년 대법원 중앙정원에 설치된 ‘법과 정의의 상’이 있다. 영월 장릉에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안은 모습을 형상화한 ‘충절의 상’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엄흥도의 직계손으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이 작품도 화제가 됐다.

그는 60여년간 금속 물질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의 실존과 영성,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산업혁명 이후 금속의 시대를 살고 있고, 오늘날 과학문명 중심인 반도체도 그 위에 있습니다. 금속이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듯 현대 조각에서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금속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철과 구리, 알루미늄 등 ‘금속 가족’과 함께해온 이유입니다.”

전시는 이러한 작업 세계를 ‘탈창조’라는 개념으로 압축한다. 철학자 시몬 베유에게서 가져온 말로, 자아를 비워 개인을 넘어선 창조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강한 힘과 긴장감을 드러낸 초기 금속 조각부터 빛과 여백을 끌어들인 최근의 ‘낯선 자’ 작업까지 36점을 선보인다.

미술대학이 없는 카이스트에 세워진 미술관은 미래 기술의 방향을 잡으려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카이스트에 515억원을 기부한 고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의 기금을 바탕으로 연면적 2611㎡ 규모로 2024년 12월 문을 열었다. 정 회장이 백남준 작품 등 41점을 기증한 뒤 미술관 설립을 뒷받침한 이광형 전 총장 등의 기증이 이어져 현재 소장품은 약 400점에 이른다. 예술원 회원들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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