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AI가 써줬어요"…수사관 잡는 '화려한' AI 고소장
"AI는 처벌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못해줘요?"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수사관 A씨가 최근 고소인 조사 과정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증거 부족으로 혐의 성립이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을 해도 고소인은 20쪽짜리 고소장을 들이밀며 항의했다.
A씨는 한 번은 고소장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고소인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사실 AI로 썼다"고 실토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챗GPT나 제미나이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고소장을 작성·제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수사 현장에서는 이른바 'AI 고소장'에 부실하거나 과장된 내용이 담기는 경우도 적지 않아 업무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호소가 나온다. 어려운 말 가득…사실관계 검증만 한세월21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일선 경찰서 수사관에게 'AI 고소장'은 이제 일상이 됐다.
AI가 고소인의 피해 사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지만, 일반인이 쓰기 어려운 법률 용어나 판례가 빽빽하게 담겼을 뿐, 정작 핵심이 되는 피의 사실은 빠져 있거나 사실관계가 부풀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현장 수사관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정작 고소인 조사 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서울 마포경찰서의 한 수사관은 "어려운 문구를 적어와서 조사 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면 고소인 본인도 대답을 못 하고 머리만 긁적이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도 않은 내용까지 AI가 써준 대로 억지로 집어넣다 보니, 수사관이 일일이 사실관계를 가려내고 검증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토로했다. 특히 2023년 11월 '고소·고발장 반려제'가 폐지된 이후 고소·고발장을 일단 접수해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사관들이 방대한 분량의 AI 고소장을 일일이 검토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는 점도 현장의 피로를 키우고 있다.
AI가 제시한 법률적 판단을 근거로 경찰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관악경찰서의 한 수사관은 "민원인이 'AI에 알아보니 범죄가 된다는데 왜 안 해주냐'며 우기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 법률상 죄가 안 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본서, 서울청, 국민신문고 등까지 반복 민원을 넣는 경우도 있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거스를 수 없는 'AI 일상화'…수사관도 대응력 키워야 다만 변호사의 도움 없이 홀로 고소를 진행하는 시민들이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개인의 AI 사용 자체를 막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변화한 환경에 맞춰 수사 체계와 대응 가이드라인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장 수사관들 역시 AI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서울 강남경찰서의 한 수사관은 "AI 이야기를 들먹일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에 AI를 활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사람도 오류가 많은 만큼 AI가 사건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줄 때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쏟아지는 'AI 고소장' 속에서 핵심을 신속하게 가려내고 검증할 수 있는 대응력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경찰도 수사 과정에서 AI 활용 방안을 고심하는 만큼 민원인이 형사사법 절차에 대응하며 AI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며 "경찰 내부적으로 접수된 서류의 의존성과 오류를 검증할 최소한의 원칙과 가이드라인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관 개개인의 AI 대응 역량, 이른바 'AI 리터러시'를 키워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AI가 장황하게 뽑아낸 자료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의 핵심을 가려내는 숙련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AI로 만든 방대한 자료가 첨부되면 수사관 입장에서 검토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핵심 수사 방향이나 진술 파악이 방해받을 우려가 있다"며 "경찰이 AI 활용 패턴을 파악하고 필요한 핵심을 신속히 걸러내는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개별 수사관들이 더욱 효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 현장의 적응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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